매일 읽기 4 기타 2020. 1. 4. 12:35

그 장면들은 자기표현 욕구라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이야기와 재현되는 것 사이의 엇갈림, 또는 자신의 이야기와 기억의 엇갈림을 본인이 알아차리고 어떤 행동을 취하는 순간이었으며, 제가 바란 것 이상으로 생성의 순간 혹은 다큐멘터리였습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 P044

매일 읽기 3 기타 2020. 1. 3. 00:38

도쿄 국제영화제 참석차 일본에 와 있던 허우샤오시엔 감독을 만났을 때 이렇게 정곡을 찔려서, "그렸습니다. 자신이 없어서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디에 카메라를 둘지는 그 사람의 연기를 현장에서 지켜본 뒤에 비로소 정해지는 게 아닌가. 당신은 다큐멘터리를 찍었으니 알겠지?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P027

하지만 그 영상이 제게는 '발견'이었습니다. 편집을 시작했더니 상영용으로 찍은 추억 재현 필름보다 일반인이 추억을 이야기하고 재현 장소에 서서 고민하는 메이킹 영상이 더욱 생생하고 리얼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재현'이 아닌 '생성'이었습니다. 그래서 방침을 바꾸어 메이킹 영상을 영화에 남기고, 추억 재현 필름은 작품에는 넣지 않기로 했습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고레에다 히로카즈>P039

매일 읽기 2 기타 2020. 1. 2. 23:41

하루의 설계도
바닷물이 발을 적시면...어린 시절이 떠올라요. 그리고 한 친구를 속여 멀리 떠나보낸 기억도요. 저는 수영에 빠져 살았습니다. 틈만 나면 강습도 받으러 다녔죠. 그런데 한번은 요상한 수업을 했어요. 잠옷을 입고 수영장 바닥에 떨어뜨린 고무 벽돌을 가져오라는 거였죠. '잠옷을 입고 수영할 일이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번거롭기까지 하잖아요. 잠옷이 젖으면 잘 때 입을 수 없으니. 마침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고 있을 때라 여분도 없었거든요. 여름방학이 되면 저는 바닷가에서 홀로 지내시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며칠씩 놀다 오곤 했죠. 할아버지는 역시 수영이나 신나게 하라고 저를 부르신 거였어요. 수영 강습이 끝나면 언제나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과묵한 분이셨어요. 말수가 적으셨죠.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의 침묵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는 시간이 무척 좋았답니다. 할아버지 집에는 골동품이 가득했습니다. 진귀하지만 이상해 보이는 것들도 많았죠. 가장 특이했던 건 죽 늘어선 괘종시계들이었어요. 시계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째깍째깍 소리를 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집채만 했죠. 문자판 위에는 낮과 밤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도 있었고요. 그림은 마치 사람 얼굴 같았습니다. 눈, 코, 입이 정교하게 묘사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시계들 때문에 저는 매일 잠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밤에는 째깍거리는 소리에, 아침에는 또 할아버지가 시계 밥을 주신다고 끼리릭 끼리릭. 그 많은 모든 시계에요! 태엽 감은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 소리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할아버지는 시계 열쇠를 애지중지 목에 걸고 다니셨어요. 그걸로 모든 시계들이 완벽하게 박자를 맞추게 하느라 애쓰셨죠. 저는 할아버지의 이 이상한 습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를 도와 정원을 가꾸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정원은 집안이랑 묘하게 닮았어요. 다양하고 아름답지만 이상한 식물로 가득했답니다. 그런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일을 멈추어야 했죠. 집안에서 갑자기 경보음이 울렸거든요. 할아버지는 당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집으로 들어오면 안된다고 제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안으로 뛰어들어가셨죠.

<하루의 설계도, 로버트 헌터>P11~19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