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기 2 기타 2020. 1. 2. 23:41

하루의 설계도
바닷물이 발을 적시면...어린 시절이 떠올라요. 그리고 한 친구를 속여 멀리 떠나보낸 기억도요. 저는 수영에 빠져 살았습니다. 틈만 나면 강습도 받으러 다녔죠. 그런데 한번은 요상한 수업을 했어요. 잠옷을 입고 수영장 바닥에 떨어뜨린 고무 벽돌을 가져오라는 거였죠. '잠옷을 입고 수영할 일이 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번거롭기까지 하잖아요. 잠옷이 젖으면 잘 때 입을 수 없으니. 마침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고 있을 때라 여분도 없었거든요. 여름방학이 되면 저는 바닷가에서 홀로 지내시는 할아버지를 찾아가 며칠씩 놀다 오곤 했죠. 할아버지는 역시 수영이나 신나게 하라고 저를 부르신 거였어요. 수영 강습이 끝나면 언제나 할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과묵한 분이셨어요. 말수가 적으셨죠. 하지만 저는 할아버지의 침묵 속에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는 시간이 무척 좋았답니다. 할아버지 집에는 골동품이 가득했습니다. 진귀하지만 이상해 보이는 것들도 많았죠. 가장 특이했던 건 죽 늘어선 괘종시계들이었어요. 시계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째깍째깍 소리를 냈습니다. 그중에 하나는 집채만 했죠. 문자판 위에는 낮과 밤의 변화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도 있었고요. 그림은 마치 사람 얼굴 같았습니다. 눈, 코, 입이 정교하게 묘사돼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시계들 때문에 저는 매일 잠과의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밤에는 째깍거리는 소리에, 아침에는 또 할아버지가 시계 밥을 주신다고 끼리릭 끼리릭. 그 많은 모든 시계에요! 태엽 감은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 소리 얼마나 소름 끼치는지! 할아버지는 시계 열쇠를 애지중지 목에 걸고 다니셨어요. 그걸로 모든 시계들이 완벽하게 박자를 맞추게 하느라 애쓰셨죠. 저는 할아버지의 이 이상한 습관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를 도와 정원을 가꾸기로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정원은 집안이랑 묘하게 닮았어요. 다양하고 아름답지만 이상한 식물로 가득했답니다. 그런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우리는 일을 멈추어야 했죠. 집안에서 갑자기 경보음이 울렸거든요. 할아버지는 당신이 돌아오기 전까지 집으로 들어오면 안된다고 제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안으로 뛰어들어가셨죠.

<하루의 설계도, 로버트 헌터>P11~19P

매일 읽기 1 기타 2020. 1. 2. 23:39

프롤로그
무(無)에서 우주가 탄생했다. 신생아 우주는 자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끊임없이 팽창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칠흑 같은 공간에서 최초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아홉 형제'라 불리는 존재들이. 그들은 차디찬 우주를 고요히 표류했다. 그러던 어느 날 꼼짝도 하지 않던 아홉 형제에게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들은 우주의 먼지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홉 형제에게는 주위 물질을 끌어당기고 재구성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은 이 능력을 이용해 저마다의 안식처를 빚었다. 아홉 형제의 안식처가 우주를 가득 채웠던 먼지들을 빨아들이자, 그동안 가리어져 있던 찬란한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층에 파묻힌 아홉 형제는 그 빛을 영영 보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한 형제는 안식처가 완성되어도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예술적 기질이 다분했던 그는 식물을 창조했고, 그것을 성장시켜 안식처 표면에 도달하게 했다. 표면을 뚫고 나온 식물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변했다. 너무나 아름하고 다양하게.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명체도 탄생했다. 이 사실은 신경처럼 연결된 식물 뿌리를 통해 그에게도 전달됐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그는 호기심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식물이 변한 이유를 알아내기로 마음먹고, 애써 만든 안식처를 부수고 표면으로 향했다. 표면으로 나온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접하는 밝음과 따사로움. 그리고 온갖 향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식물들이 모두 하늘에 밝게 빛나는 구체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오랫동안 구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게 됐다. 그는 구체를 가까이 두고 싶었다. 그래서 안식처를 만들 때의 힘을 다시금 발휘해 구체를 힘껏 끌어당겼다. 그리고 구체를 품에 안는 날에 선물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알록달록한 식물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구체와 만나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만다. 너무 오랫동안 온몸의 기운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 식물을 자라게 하는 능력은 사라졌고, 그가 사랑하는 존재는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하게 다시 멀어져 있었다. 아무리 끌어당기려 해봐도 구체는 예전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구체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하루의 설계도, 로버트 헌터>P2-P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