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읽기 10 기타 2020. 1. 11. 09:11

그건 제 지시가 아니라 자연발생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저는 솔직히 감동했습니다. 배우라는 매우 허구적인 존재가 일반인에게 영향을 받아 스스로 웃고 노래하고 움직이는 장면을 처음 봤기 때문입니다.
배우에게서 자발적, 내발적으로 생겨나는 감정을 이용하여 영화를 한편 찍으면 재미있겠다. 그렇게 생각한 저는 차기작 <디스턴스>에서 배우를 쓰긴하되 각본없이 역할과 설정만으로 찍는 일종의 실험적 스타일을 시도했습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p138

매일 읽기 9 기타 2020. 1. 9. 16:56

그날 방송국이나 신문사 등 각 미디어는 이른 아침부터 헬리콥터를 띄워 조유 씨가 출소한 뒤부터 그를 뒤쫓았습니다. 신주쿠의 호텔에서 숙박을 거부당한 그는 결국 요코하마의 교단 시설에 머무릅니다. 진행자도 해설자도 '위험하다'고 비판했지만, 미디어가 그를 교단 말고 돌아갈 장소가 없도록 몰아간 것은 명백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범죄란 범죄자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고름이 그런 형태로 나타난 것이며, 이는 분명 우리와 관계가 있다'는 시점으로 범죄를 보도하는 것이 미디어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논픽션 작가가 범죄자를 제재로 책을 쓸 때도 마찬가지여서 범죄자가 우리와 관계없는 악마 같은 존재라면 써 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법적으로 제재를 받는다는 전제를 가진 사람에게 사회적으로도 제재를 가하는 것이 텔레비전의 역할은 아니겠지요. 보도의 목적은 범죄나 범죄자를 우리 사회의 '음의 공유재'로 삼아 그러부터 교훈을 얻는다는 태도가 특히 텔레비전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옴진리교가 일으킨 일련의 사건 이후 미디어도 시민도 그들을 '배제'하는 쪽으로 움직었습니다. 배제야말로 정의를 위협하는 존재가 외부에서 우리를 습격할 때 안전한 우리 사회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정의다"라고 말하는 것처럼요.
조유씨가 출소하기 며칠 전, 저는 연출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12월 24일 (금)
가족이라는 이야기=허구의 붕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옴진리교 사건을 통해 생각한다는 것인가. 어느쪽이든 중요한 건 현실과 허구, 일상과 비일상, 피해자성과 가해자성 등 이중성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는 거겠지-

두 청년의 로드무비로 시작된 세 번째 기획 <디스턴스>는 플롯을 써 나가는 단계에서 이와 같은 사고에 이르렀고, 조유 씨의 연말 출소에 관한 보도를 접하면서 '피해와 가해의 이원론'에 위화감과 반발심을 느낀 제 생각이 짙게 반영되었습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p127-129

매일 읽기 8 기타 2020. 1. 8. 23:39

앞서 말한 '무스탕 조작 사건'으로 떠들썩할 때, 신문 보도 등에서 '다큐멘터리는 사실을 축적하여 진실에 이르는 것이다'라는 논조가 다시 시계추처럼 반복되어 프로덕션에서조차 연출은 좋지 않다, 되도록 삼가야 한다'는 풍조가 만연했습니다. '다시 거기로 돌아가는 건가?' 싶어 걱정스러웠던 저는 '다큐멘터리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제 모색을 그대로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다큐멘터리의 정의>입니다.
이 작품의 취재차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역사를 제 나름대로 조사했더니 1960년대가 명백하게 재미있었습니다. 연출에 대해 철저하게 자각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라는 존재를 전면적으로 내보이거나 조작을 방법론으로 승화시키는 등 각각의 연출가들이 연출이라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작품에서는 1967년을 보도.다큐멘터리의 분기점으로 삼아 그 무렵의 뛰어난 다큐멘터리 방송을 예로 들었습니다. 특히 <JNN 뉴스코프>의 초대 캐스터 덴 히데오가 북베트남에서 직접 취재한 증언을 토대로 영상을 틀며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뉴스 다큐멘터리 <하노이.덴 히데오의 증언>, 나리타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농민운동(산리즈카 투쟁)을 기록한 오가와 신스케의 영화 '산리즈카' 시리즈는 중립과 공평, 연출과 조작에 대해 생각할 때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무스탕 조작 사건'은 다큐멘터리에서 연출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따져 물을 좋은 기회였습니다. 객관적 사실 같은 건 실제로는 찍을 수 없다는 점을 만드는 쪽도 보는 쪽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가장 좋은 기회가 되어야 했습니다.
어쨌거나 일본인은 '다큐멘터리란 손대지 않은 사실에 카메라를 가져다 대고 진실을 찍는 것'이라는 사실 신앙이 몹시 강합니다. 반면 세계의 수많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중에는 재현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많으며, 보는 쪽도 그에 대한 이해도가 높습니다. 그러므로 뼈아픈 소리지만 일본도 보는 쪽이 성숙하지 않으면 성숙한 작품이 만들어지지 않을 테고, 전과 같은 발전 없는 논쟁이 다시 벌어지겠지요.
시대와 함께 갱신되어야 하는 방법론을 어떻게 해석하고 재구축해 나갈 것인가, 우리 창작자들은 지금 한번 스스로에게 따져물을 시기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p117-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