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기 54 기타 2020. 4. 29. 22:28

엄마는 지금 아른 살이 코앞인 '왕 할머니'가 아니라 열다섯 살 소녀처럼 말하고 소리 내고 행동하고 있다. 혹시 노망이 나신 것일까, 가슴이 덜컹거리지만 이 요양원에 오지 않았다면 저렇게 말하지도 노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손 잡아주는 이도 없었을 것이고 예쁘다고 말해주는 이도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원장에게 잡힌 손을 꼭 잡고 오래 놓지 않았다. 아들들은 저렇게 눈을 마주치고 다정하게 오랫동안 엄마의 손등을 쓸어주지 않는다. 두툼하고 따뜻한 손을 가진 남들에게 관심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말투까지 바꾼 엄마의 속마음이 안쓰럽게 느껴져서 민망한 와중에도 엄마가 이 요양원에 잘 적응한 것 같아서 '다행이야, 참 다행이야'라고 여러 번 생각했다.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p51

매일 읽기 53 기타 2020. 4. 29. 22:20

아프고 늙는 데에도 강약의 리듬이 있다. 나름 질서 있게 오르내리던 엄마의 병과 늙음의 리듬은 이제 변화가 거의 없다. '약약' 밖에 치지 못한다. 그래도 늙는 속도가 빨라져 키도 발도 쪼그라진다. 윤기 있는 붉은 살이 가파르게 뼈를 떠나가고 피부가 비닐처럼 얇아지고 찢어진다. 사람의 살이 햇살에 마른 비닐처럼 찰기 없이 메말라진다.
가을걷이를 앞두고 낡은 비닐처럼 변해버린 피부에는 반창고 하나 붙였다 뗄 때도 조심해야 한다. 피부껍질이 습자지처럼 얇게 겨우 붙어 있어 연고 묻은 일회용 밴드의 미미한 끈기마저 거부하지 못하고 딸려나온다. 어디서 부딪혔는지 모를 멍들이 엄마의 피부를 다 덮었다. 한 번 생긴 반점은 점점 넓어지고 새로 생긴 반점들이 빈 사이를 메꾼다. 분바른 얼굴 빼고 온몸에 검푸른 반점들이 그라데이션 된 것처럼 흘러 다닌다. 가만히 엄마 몸에 핀 저승꽃을 만져보려니 엄마가 어리광 피우듯 말했다. 심지어 남의 일처럼 웃어보이면서. "누가 나 몰래 자꾸 때리나 봐. 자고 일어나면 이렇게 퍼렇게 멍이 들어 있지 뭐니?"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p43

매일읽기 52 기타 2020. 4. 27. 22:52

나부터도 모셔 오고 싶지 않았다. 때로는 간절하게 '네 차를 타고 네 집에 가고 싶다'는 엄마의 사인을 눈치 챘으면서도 착한 딸 노릇을 해보려는 내 마음을 극구 외면했다. 모셔온다 해도 엄마를 집에 가둬놓는 거나 마찬가진데 뭐. 삼시세끼 신경쓰랴,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며 말 걸기를 고대하는 모습이 생각보다 보기 힘겨운 걸. 혼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집이 없다면 엄마나 나나 남의 집에 사는 것 같아질 테고 징역살이가 되는 걸.
매일매일 혼자 방 안에 갇혀 있는 노인들이나 그 노인들을 두고 자기 삶을 사는 자식들이나 누굴 탓할 게 아니었다. 누가 학대할 마음으로 부모를 붙잡아 두겠는가. 어느 부모가 자식을 괴롭히려고 숨 쉬고 움직이겠는가. 한 공간에 다른 존재 둘이 갇혀 살다보면 둘 다 나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존재가 존재를 미워하게 되는 것.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상대를 괴롭히게 되는 게 부모 자식 간이라고, 엄마와 딸 사이라도 다를 것은 없다. 하물며 물고 빨 정도로 서로 사랑하는 것도 아니라면. 인연의 빨간 끈을 따라 그저 내 엄마가 되고 내 딸이 되어 태어나 서로 오래 너무나 다르게 살고 있었다면. 그 오랜 엄마라 해도 아빠라 해도, 내 자식이라 해도, 누군가 하나는 온전히 다른 하나에게 기대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면 더더욱 힘들 수 밖에. 늙고 아파서 누군가의 도움의 손이 필요할 때에는 같은 집에 살 게 아니라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그렇게 하게 되었다. 냉정하기가 뱀처럼 차가워 보일지라도 따로 살아야 한다고.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p2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