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읽기 1 기타 2020. 1. 2. 23:39

프롤로그
무(無)에서 우주가 탄생했다. 신생아 우주는 자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끊임없이 팽창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칠흑 같은 공간에서 최초의 존재들이 등장한다. '아홉 형제'라 불리는 존재들이. 그들은 차디찬 우주를 고요히 표류했다. 그러던 어느 날 꼼짝도 하지 않던 아홉 형제에게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들은 우주의 먼지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홉 형제에게는 주위 물질을 끌어당기고 재구성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들은 이 능력을 이용해 저마다의 안식처를 빚었다. 아홉 형제의 안식처가 우주를 가득 채웠던 먼지들을 빨아들이자, 그동안 가리어져 있던 찬란한 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층에 파묻힌 아홉 형제는 그 빛을 영영 보지 못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한 형제는 안식처가 완성되어도 무언가를 만드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예술적 기질이 다분했던 그는 식물을 창조했고, 그것을 성장시켜 안식처 표면에 도달하게 했다. 표면을 뚫고 나온 식물은 그의 생각과는 전혀 다르게 변했다. 너무나 아름하고 다양하게.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생명체도 탄생했다. 이 사실은 신경처럼 연결된 식물 뿌리를 통해 그에게도 전달됐다. 아무것도 볼 수 없었던 그는 호기심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식물이 변한 이유를 알아내기로 마음먹고, 애써 만든 안식처를 부수고 표면으로 향했다. 표면으로 나온 그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 접하는 밝음과 따사로움. 그리고 온갖 향연.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지? 답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식물들이 모두 하늘에 밝게 빛나는 구체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도 오랫동안 구체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게 됐다. 그는 구체를 가까이 두고 싶었다. 그래서 안식처를 만들 때의 힘을 다시금 발휘해 구체를 힘껏 끌어당겼다. 그리고 구체를 품에 안는 날에 선물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크고 알록달록한 식물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구체와 만나기도 전에 깊은 잠에 빠져버리고만다. 너무 오랫동안 온몸의 기운을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낯선 곳에 누워있었다. 식물을 자라게 하는 능력은 사라졌고, 그가 사랑하는 존재는 그동안의 노력이 무색하게 다시 멀어져 있었다. 아무리 끌어당기려 해봐도 구체는 예전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구체가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무기력하게 누워있었다.

<하루의 설계도, 로버트 헌터>P2-P10